세상구경 이야기

윤봉길 의사 - 매헌기념관에 다녀오다

김씨줌마 2014. 3. 25. 20:49

양재시민의 숲에 있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다녀왔다..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 역에 내려 5번출구로 나와 3m 앞에서

신호등을 건너면 매헌기념관이다..무료관람이며 월요일은 휴무이다..

 

 

 

 윤봉길의사의 본명은 우의이고..아호는 매헌...봉길은 별명이라고한다..

봉길이 본명이 아니고 별명이였다니...

상해 홍구공원에서 정확한 폭탄 투척으로  큰 뜻을 이루신 당당한 모습

 

 

15세때 지은 시...강인한 성품이 느껴진다.. 

 

 

 

 

 

 윤봉길의사가 사용하셨던 유품..

 

 

 스무살에 농민독본을 저술하고 월진회를 만들어 농촌부흥운동을

주도하였다고한다....윤봉길의사가 만든 월진회의 깃발은 무궁화를 중심에 두고  흰색바탕은 백의민족을...세개의 줄은 삼천리강산을 나타

낸다고 한다..

 

 

 어느날..글을 모르는 한 농부가 아버지의 산소를 찾기위해 산소의 푯말을 모두 뽑아들고 윤봉길의사를 찾아와 푯말을 보여주며 어느것이 제

아비의 것인지를 물었다고한다...윤봉길의사 덕분에 농부는 제 아비의

푯말은 찾았으나 푯말을 뽑은 산소를 표시해 놓지않아  아예 제 아비의산소를 잃어버려 우는 모습을 보고...글을 몰라 제 아비 뿐만아니라

남의 조상에까지 불효를 하는구나...하고 탄식하며 그일이 계기가 되어 글을 가르치고 책을 쓰며..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23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망명길에 오르기전 남기신 글...

장부출가생불환....집을떠나 뜻을 이루기전엔  돌아오지않겠다...라는

결연한 의지의 글을 남기셨다..이때...부인은 작은아이를  복중에 품고있었는데....말없이 부인에게 물 한사발 받아마시고...부모와 처자식을 뒤로하고 집을 떠났다고 한다..

 

 

 큰 아이와...태어나는것을 보지못한 작은 아이에게 남기신 유언..

사사로이 아비의 죽음을 슬퍼하지말고 조선을 위해 용감하게 살라는

당부의 말을 남기셨다..

 

 

 철저한 준비로 행사를 하고있던 일본군들에게 정확하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를 폭사시켰다...당시 중국의 장계석 총통은...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며 이때부터 임시정부를 적극지원 했으며 군대의 정식 군사훈련을 받을수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또한...이 사건은 꺼져가던 독립운동의 불씨가 살아나는 계기가 되어

해외동포들도 적극 첨여하고...카이로회담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수통폭탄과  자결용 도시락폭탄...미처 도시락 폭탄을 쓰기전에

일본군에 붙잡히셨다..

 

 

 상해로 떠나기전 김구선생과 함께한 윤봉길의사..

 

 

 

 

 

 

 

 

윤봉길의사 나이 25세때 순국하셨다....윤봉길의사는 미간에 저격 당했는데...심장에 저격하면 고통없이  즉사하는데...정확하게 미간에 저격한것은 고통을 주기위함이라고한다..힘없는 나라의 설움과 일본의

만행에대한 분노..잔혹한 역사에 마음이 먹먹해지는 순간이였다..

 

 

 나라를 위해 값진 목숨을 바친 윤봉길의사...일본군은 윤봉길의사를

저격시킨것으로도 부족하여 봉분없이 암매장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다니게 하였다고 한다...해방후 백범선생이 유해를 봉환해

효창원 묘역에 안장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의사...

선열의 높은 뜻을 잊지말아야 하는데....하지만...안타깝게도...

매헌기념관은 현재 운영의 어려움이 있어 전기가 절전되기도 하는

어려움에 놓여져있다...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신 선열들의 뜻이

흐려지는듯하여 쓸쓸한 마음이 들었던 매헌기념관 방문이였다...